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Queer

미켈란젤로 코드 : 그의 작품속에 숨겨진 게이 코드


미켈란젤로 코드 : 그의 작품속에 숨겨진 게이 코드



미켈란젤로 부오나로티  Michelangelo Buonarroti


미켈란젤로 Michelangelo 의 소네트

(*소네트 : 서양 시가의 한 형식으로, 14행으로 이루어진 짧은 시)


식음을 잊는 것이 그대의 이름을 잊는 것보다 훨씬 쉽다오


그대의 이름은 나의 육신과 정신 모두를 부양한다오.


내가 살아 있는 한, 어디를 가든 

나는 오로지 당신만을 사랑할 겁니다


하루라도 당신을 만나지 못하면 어디에도 평안이 없습니다.


당신이 웃음 지으며 인사를 할 때 나는 용광로처럼 불타오릅니다.   


이 감미로운 연시들은 미켈란젤로가 사망하고 60여년이 흐른 뒤 미켈란젤로의 종손(조카의 아들)에 의해 발견되었다. 발견자는 미켈란젤로의 아름다운 글귀에 감탄하였지만 그 감탄은 이내 수치와 혐오로 변모하게 된다. 이토록 아름다운 연시들은 모두 미켈란젤로가 남성들에게 바친 연시였던 것이다.


발견자는 미켈란젤로의 글이 너무 아름다워서, 혹은 돈이 벌고 싶어서? 출판을 하려 하였지만 그대로 출판을 하게 된다면 가문의 수치가 될 것이리라 판단하였다. 하여 미켈란젤로의 연시들의 대상들을 모두 여성으로 바꿔, 동성애를 지우고 이성애로 둔갑시킨 뒤 미켈란젤로의 연시들을 책으로 출판하게 된다.


이에 몇백년 동안 미켈란젤로가 게이였다는 사실이 철저히 은폐되었고 사람들은 미켈란젤로를 로맨틱한 이성애자로 기억했다. 


19세기말 영국의 동성애 운동가 존 애딩턴 시먼즈가 (John Addington Symonds 1840.10.05~1893.04.19연시의 대상들을 다시 남성으로 복구했지만 또 다시 학자들에 의해 은폐되었고. 다시 또 백년이란 세월이 흘러 20세기 후반이 되어서야 미켈란젤로가 동성애자였다는 사실이 인정되기 시작했다.




미켈란젤로가 사랑한 남자


다비드, 피에타, 천지창조, 최후의 심판등으로 유명한 미켈란젤로. 그는 당시 라이벌이었던 레오나르도 다 빈치나 라파엘로와 같이 화려하게 살지 않았다. 미켈란젤로는 말수가 적고 내성적이며 검소한 생활을 하는 착실한 사람이었다.


이러한 외골수가 1532년 57세의 나이로 23세의 한 청년과 지고지순한 사랑에 빠지게 된다. 바로 토마소 데 카발리에리이다. (Tommaso dei Cavalieri)


미켈란젤로는 카발리에리 이전에도 젊고 잘생긴 남성 모델들에게(게라르도 페리니, 페보 디 포기오관심을 갖고 연시를 보낸 전적이 있지만 모델들이 원했던 것은 미켈란젤로의 명성과 돈 뿐이었다. 이러한 짝사랑에 미켈란젤로는 우울증에 빠지기도 하였지만 카발리에리는 남달랐다. 그는 잘생긴 얼굴에 탄탄한 육체는 물론 세련된 매너와 고상한 성품을 지녔으며 심지어 예술을 함께 논할 수 있는 비범한 지성을 겸비한 귀족 출신의 청년이었다.


미켈란젤로는 카발리에리에게 흠뻑 빠져들었으며 ‘그대의 아름다운 신체를 감싸는 옷'이 되고 싶다며 고백을 하였고 그를 향해 수많은 연시들을 헌정하였다. 또한 <가니메데스의 납치 The Abduction of Ganymede><드림 The Dream>자신을 독수리로 둔갑한 제우스로 묘사하여 카발리에리를 겁탈하는 그림을 함께 보내기도 하였고, 자신이 의뢰받은 작품을 카발리에리를 본따 완성하기도 하였다. 그들은 그렇게 32년간 끈끈한 관계를 맺었으며 미켈란젤로는 카발리에리의 품에 안긴 채 행복한(?) 죽음을 맞이했다고 한다.





미켈란젤로의 작품의 동성애 코드


미켈란젤로는 남성의 육체와 근육을 탐닉하였으며 남성의 신체를 매우 노골적으로 표현하였다. 또한 의뢰받은 작품의 주인공의 성별이 여성이라 할지라도 건장한 신체의 젊은 청년들을 아틀리에로 불러들여 모델로 세웠다하여 미켈란젤로는 당대인들에게 '남색자', '여성혐오자'로 불리기도 하였다. 


조각상 다비드 : 남성 신체의 아름다움을 극한 까지 표현한 미켈란젤로의 대표작중 하나 / 조각상 승리 : 미켈란젤로가 연모하던 카발리에리를 구세주로 묘사한 조각상 / 조각상 밤 : 여성 조각상이지만 남자를 모델로 고용하여 완성


세스티나 성당의 천장화 : 미켈란젤로는 4년6개월의 시간에 걸쳐 이 천장화를 완성하였다. 오늘날 수많은 관광객이 미켈란젤로의 작품을 보기위해 방문하는 곳이다. 천장화는 대부분 남성들의 나체로 채워져 있으며, 여성들의 육체는 근육질의 남성으로 묘사되고 있다. 천장화에는 수많은 동성애 암시 코드가 내포되어 있으며 세스티나 성당에 동성애 투어 상품이 생겼다고도 한다.


구약성서를 바탕으로 그려진 <빛과 어둠의 분리><해와 달의 창조><물과 흙의 분리><아담의 창조>의 작품을 보면 창조주, 즉 하나님은 핑크색 옷을 입고 있다. 왜 하필 핑크색일까? 당시 고대 로마에 장미는 온통 핑크색뿐이었다. 하여 핑크는 장미(rosa)와 같은 뜻이었고, 장미는 물론 연애를 상징한다.


또한 <아담의 창조>에서 아담의 몸은 탄탄한 근육질이지만 얼굴은 매우 예쁘장하다. 그리고 그의 다리는 굳이 바깥 쪽으로 열어 보란듯이 성기를 드러내고 있다.


<해와 달의 창조>를 보면 창조주가 벌거벗은 엉덩이 두쪽을 모두 드러낸 채 태양의 왼쪽으로 돌아가는 장면이 있다. 


<만취한 노아> 미켈란젤로의 동성애 암시 대표작으로 손꼽히는 작품이다. 그림에서 노아는 술에 취해 잠들었고 아들 셋중 둘(셈, 야벳)은 아비의 전라를 보지 않기 위해 고개를 돌리고 있으며 다른 아들(함)은 아비의 전라를 손가락으로 가르키며 형제들에게 꼰지르고 있다.


구약성서 창세기에 나오는 이야기다. (창9:24) 노아는 잠에서 깨어나서 <아들이 자신에게 '행한 일'을 알고'> 아들이 '행한 일'에 대해 분노하여 아들 함을 저주하게 된다.



국내 많은 기독교에서는 이 구절을 통해 아들 함이 아비를 강제 추행하였으며 동성애는 죄이기 때문에 저주를 받은 것이라고 교리를 전파하고 있다. 하지만 많은 학자들은 다른 해석을 내놓고 있다. 노아가 알게 된, 아들이 자신에게 ‘행한 일’이란 히브리어로 ‘아싸’(asah)이다. 이 단어는 

성적교섭과 아무 관련이 없는 단어로, 추행이라는 해석은 잘못된 것이며, 함이 다른 형제들과 같이 고개를 돌리지 아니하고 아비의 전라를 응시하고 직면한 점, 아비의 부끄러운 모습을 즉시 캐어하지 않고 형제들에게 알린 점 아비에 대한 예우를 다 하지 않은 것이 노아의 분노를 산 것이라 설명한다. 뭐 여튼, 이러한 에피소드를 미켈란젤로는 아들들까지 포함하여 전라 상태로 천장에 그려놓은 것이다.


<최후의 심판> 남성의 누드로 가득 채운 노골적인 묘사의 정점을 찍은 작품. 이 작품에서 그리스도의 모습은 기골이 장대한 나체로 그려져 있다. 또한 자신이 사랑한 남자, 카발리에리를 그리스도로 그려냈으며 묘사가 너무 완벽해 동료 화가들이 알아보기도 하여 논란이 되었고, 완성된 그림을 본 교황청은 그리스도의 전라에 기겁하며 아랫도리에 천을 그려 입히는 덧칠을 작업했다. 아무튼 많은 논란이 있었던 작품이며 목욕탕, 게이천국처럼 보인다는 비판이 극에 달하며 미켈란젤로는 결국 기소당하기도 하였다.




미켈란젤로의 동성애는 플라토닉 러브였다?


미켈란젤로가 동성과 잠자리를 직접하였는지는 밝혀진 바가 없다고 한다. 하여 많은 학자들은 르네상스 시대에 변질되어 유행했던 중년 남성과 소년 사이에 플라토닉 러브를 근거로 미켈란젤로의 동성애가 유행에 따른 플라토닉 러브였을 것이라 추정한다. 


잠자리는 매우 개인적이고 내밀한 행위이다. 누가 증거와 흔적, 기록을 남기며 사랑을 나누겠는가? 심지어 동성애가 사형 또는 추방의 중죄인 시대에서 흔적을 남기며 사랑을 나누는 것이 가능하기는 했을까?


직접적인 성관계 없이 자신의 성적 욕구를 해소하는 사람들도 있다. 우리는 그런 사람들의 취향을 패티시라 부른다. 그렇다면 패티시 역시 플라토닉 러브라고 할 수 있을까?


미켈란젤로는 게이였고 한 청년을 열열히 사모했다. 굳이 그의 동성애에 '플라토닉'이라는 이름표를 붙힐 필요가 있을까? 이러한 시도가 한 시대를 풍미한 천재 예술가가 게이였다는 사실을 여전히 인정하기 싫고, 은폐하고 싶은 이성애주의적 시선은 아닐까하고 생각해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