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Queer

레오나르도 다 빈치는 게이였고, 모나리자는 남자다?!!


레오나르도 다 빈치 그는 누구? (Leonardo di ser Piero da Vinci), 1452



보편적으로 화가로 알고있으나, 레오나르도 다 빈치는 화가뿐만이 아닌 포크를 발명한 발명가이자, 스파게티면을 발명한 요리사이자, 해부학자건축가, 수학자, 천문학자, 음악가등 그야말로 전무후무한 천재중 천재였다. 


그는 1452년 4월 15일 토스카나 지방의 산골 마을, 빈치에서 태어났다. 레오나르도 다 빈치는 어려서부터 다방면으로 타고난 재능을 보였지만 귀족과 천민 사이의 사생아로 태어난 그는 하인보다 낮은 신분으로 인해 학교에 갈 수 없었다. 그의 아버지는 아들의 천재성이 발현되지 못하는 것을 아쉬워 했고 


레오나르도 다 빈치가 14살이 되던 해, 당시 피렌체에서 가장 영향력 있는 예술가 중 한 명인 '안드레아 델 베로키오'의 공방 조수로 보내게 된다. 안드레아 델 베로키오 역시 레오나르도 다 빈치의 천재성을 알아보고 제자로 거둬들였으며 레오나르도 다 빈치는 그의 밑에서 10년간 미술, 조각, 기술등 다양한 분야를 배우게 되었다. 레오나르도 다 빈치가 20살이 되던 해에는 피렌체 세인트 루크 길드에 가입하게 되며 신분 상승을 하게 되었고


24살이 되던 해에는 스승의 대표작, 그리스도의 세례에 참여하여 좌단에 천사를 그리게 된다. 이 작품을 통해 레오나르도 다 빈치는 스승을 능가했다는 평가를 받게 되었으며, 그의 스승은 이 작품을 끝으로 두 번 다시 그림을 그리지 않았다고 한다. 이후 레오나르도 다 빈치는 다양한 분야에서 전문가로 역량을 펼쳤으며, 3년이란 시간에 걸쳐 그린 역작 <최후의 만찬>으로 유럽 전역에서 가장 유명한 예술가가 되었다. 또한 사후에 공개 된 <모나리자>는 현재 세계에서 가장 위대한 미술품으로 인정받고 있다.




이렇게 한 시대를 풍미하고 현재까지 칭송받는 천재 예술가가 게이였다?


첫번째 근거. 


레오나르도 다 빈치가 24살 때 동성과의 매춘으로 체포당하는 사건이 발생했다. 당시 동성애는 추방 또는 사형의 중죄였지만 레오나르도 다 빈치의 천재성을 높이 산 영향력있는 귀족 가문의 도움으로 석방되었다. 무혐의 처분을 받았지만 그는 자신이 겪은 수치심에 석방 된 뒤 2년간 모든 종적을 감추고 사라졌다.


두번째 근거. 


레오나르도 다 빈치는 평생 독신으로 살았으며 어떤 여성과도 염문설이 있지 않았다. 세번째 근거. 레오나르도 다 빈치는 실력을 떠나 잘생긴 미소년만을 제자로 삼았으며 그 중 유독 총애하던 두 제자 프랑세스코 멜지(Francesco Melzi)와  안드레아 살라이(Andrea Salai)와 깊은 관계를 맺었으며. 함께 동거하였다. 이에 제자들 사이에서 '스승님이 남자를 좋아한다'는 소문이 돌기도 하였다.



네번째 근거. 


정신분석학의 창시자인 프로이트는 레오나르도 다 빈치의 어릴 적 기록과 그의 작품 <성 안나와 성 모자>를 단서로 레오나르도 다 빈치의 동성애 성향을 분석하기도 하였다. “내가 이렇게 독수리에 대해 깊은 관심을 갖게 된 것은 운명이었던 듯하다. 왜냐하면 아주 어린 시절의 기억인 것 같은데, 아직 요람에 누워 있을때 독수리 한 마리가 내게로 내려와 꽁지로 내 입을 열고는 여러 번에 걸쳐 그 꽁지로 내 입술을 쳤던 일이 있었기 때문이다.”



모나리자의 모델은 남자라는 주장.


모나리자의 실제 모델은 명확하게 밝혀진 바가 없다. 다양한 추측이 오가는 가운데 2011년 이탈리아 문화유산위원회 위원장인 실바노 빈센티는 모나리자의 모델이 레오나르도 다 빈치의 제자인 안드레아 살라이라고 주장한다. 제자 안드레아 살라이를 모델로 그린 작품 <세례 요한>의 그림 속 남성과 <모나리자>의 그림 속 여성이 닮았다는 것이다. 실제로 <세례 요한>의 그림 속 남성과 <모나리자>의 그림 속 여성을 비교해보면 눈의 크기와 양 옆으로 긴 눈매, 미간에서부터 코끝까지의 길이와 입술의 모양, 입꼬리, 턱과 볼, 심지어 목선까지 일치했다. 또 한가지 근거 레오나르도 다 빈치가 13년이란 시간에 걸쳐 완성한 작품, 완성한 후에 늘 품에 지닌 채 가지고 다녔던 작품 <모나리자>를 죽기 직전까지 공개하지 않고 간직하고 있다가, 임종 직전에 제자 안드레아 살라이에게 유산으로 남긴다고 유언한 점이다. 




레오나르도 다 빈치가 사랑한 두 남자. 프랑세스코 멜지와 안드레아 살라이.


레오나르도 다 빈치는 1519년 4월 23일 유언을 남기고 그 다음 주인 5월 2일에 사망하게 된다. 유언 집행은 레오나르도 다 빈치와 가장 가까운 관계였던 프랑세스코 멜지가 집행하였다. 프랑세스코 멜지는 귀족 출신으로 어려서부터 스승의 외로움을 잘 이해했으며 제자가 된 이후 레오나르도 다 빈치가 죽을 때까지 15년간 함께 동거하였으며 서로를 극진히 돌보았다고 한다. 레오나르도 다 빈치가 죽은 뒤 그의 작품과 크로키, 메모를 비롯한 대부분의 재산을 상속하였으며 그는 고향으로 돌아가 결혼하여 8명의 자녀를 낳았다고 한다. 


안드레아 살라이는 레오나르도 다 빈치가 소유한 포도밭 소작농의 아들로 태어나 아무런 재능이 없었지만 10살때 레오나르도 다 빈치의 제자가 되었고 레오나르도 다 빈치가 사망하기 1년전, 38세의 나이로 레오나르도 다 빈치의 곁을 떠났다. 그는 앞서 이야기 했듯이 레오나르도 다 빈치가 애지중지하던 작품 <모나리자>와 포도밭을 유산으로 상속 받았다. 안드레아 살라이 역시 고향으로 돌아가 43에 결혼하였으나 1년뒤 결투에서 패배하여 죽음을 맞이하게 된다.


레오나르도 다 빈치의 제자들이 양성애자였는지, 이성애자였는지는 알 수 없는 노릇이다. 하지만 분명한 것은 두 사람 모두 자의든 타의든 레오나르도 다 빈치와 깊은 관계를 맺어왔다. 모나리자의 모델이 정말 안드레아 살라이가 맞다면 부부의 연을 맺은 프랑세스코에게는 전 재산을 남긴 것이. 그리고 갖지 못한 열망의 대상에게 자신의 혼을 남긴 것이 어느정도 납득이 된다.